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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소현세자 그는 누구인가?(역사, 인물 소개, 출생, 사망, 나이)

by 싸플00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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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소현세자


비운의 소현세자
비운의 소현세자


조선 16대 왕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9년 만에 귀국하여 세자 자리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의문사하였다. 독살설도 제기되었지만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아버지 인조는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면 본 칼럼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생애



인조반정 이후 왕이 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16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 및 민생 안정에 힘썼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중립 외교 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하던 서인 세력들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목대비의 명망을 받던 능양군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바로 인조다. (1623년) 한편 청나라에서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신을 보내왔다. 이때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이를 두고 조정 대신들은 찬반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그러나 주전론자였던 최명길만이 적극 찬성하며 강화도로 피난갈 것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한산성에서의 항전도 실패로 돌아가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버지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또한 효종 즉위 후 북벌 계획이 추진되면서 오히려 역모 혐의를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644년 청 태종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세자 일행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이때 세자는 아버지 인조로부터 받은 서신을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서양 선교사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접했고 서구문물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 독일 출신 예수회 중국인 사제 슈테판 폰 르스탕과도 친분을 쌓았다. 훗날 효종 임금이 된 봉림대군과는 달리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셈이다. 이렇게 선진 문물을 접한 뒤로는 기존의 보수적인 태도를 버리고 친청파로 돌아섰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반정공신 세력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서인세력은 노골적으로 세자를 비난했다. 급기야 인조반정의 명분 자체가 흔들리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인조는 아들을 독살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부왕의 미움을 산 세자는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만약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북학론을 주창한 선구자로서 재평가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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